2008년 10월 02일
가을
이삿짐을 태운 트럭 안에서 소녀는 말을 잊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한 번,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좌우를 돌려본다. 아버지, 어머니가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잦은 이사에 소녀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만남, 이별 그리고 새로운 만남. ‘회자정리’의 원칙을 소녀는 가증스럽다 했다. 열한 살 인생에서 열일곱 번의 이사를 했다. 가까스로 사귄 벗은 이내 저 깊은 추억의 샘에 갇힐 하나의 영장류가 되어 버렸다. 情은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이별의 생고는 또 찾아왔다.
울렁거리던 차멀미가 멈춘다. 소녀의 열여덟 번 째 집에 도착했다. 움푹 패인 도로 뒤로 집 한 채가 서 있다. 덜 된 페인트칠이 마치 세월에 벗겨진 상처 같다. 저 멀리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집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소나무가 순간 눈에 들어온다. 소녀의 얼굴에 짐짓 미소가 돈다. 떨어지는 잎사귀를 보내기가 아쉬워 차라리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더 낫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fall. 가을을 뜻하는 이 말이 ‘떨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소 소녀는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던가. 그 후로 낙엽 달린 활엽수는 측은하고도 가여운 존재로 인식됐다.
질펀한 청자색의 가을 하늘. 그 광활한 캔버스에 소녀는 황홀한 고독을 점묘하고 있었다.
# by | 2008/10/02 13:38 | INSPIRATION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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