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 해 가을, 소녀는 이사를 갔다. 함께 고무줄을 튕기던 벗들이 눈앞에서 서서히 스러져가자, 아찔한 희뜩거림에 눈을 감는다. 울음 구슬이 양 볼을 사정없이 긁어내린다. 빽빽이 세워진 아파트 단지 내에서 놀이터의 흙을 같이 쓸어 내리던 동무들이었다. 빛을 잃은 모래 흙에 모래성을 쌓아주던 고마운 벗들이었다. 바닷물에 젖어 스러진 모래성처럼 우리의 인연도 이렇게 부스러지는 걸까.


이삿짐을 태운 트럭 안에서 소녀는 말을 잊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한 번,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좌우를 돌려본다. 아버지, 어머니가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잦은 이사에 소녀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만남, 이별 그리고 새로운 만남. ‘회자정리’의 원칙을 소녀는 가증스럽다 했다. 열한 살 인생에서 열일곱 번의 이사를 했다. 가까스로 사귄 벗은 이내 저 깊은 추억의 샘에 갇힐 하나의 영장류가 되어 버렸다. 情은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이별의 생고는 또 찾아왔다.


울렁거리던 차멀미가 멈춘다. 소녀의 열여덟 번 째 집에 도착했다. 움푹 패인 도로 뒤로 집 한 채가 서 있다. 덜 된 페인트칠이 마치 세월에 벗겨진 상처 같다. 저 멀리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집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소나무가 순간 눈에 들어온다. 소녀의 얼굴에 짐짓 미소가 돈다. 떨어지는 잎사귀를 보내기가 아쉬워 차라리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더 낫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fall. 가을을 뜻하는 이 말이 ‘떨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소 소녀는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던가. 그 후로 낙엽 달린 활엽수는 측은하고도 가여운 존재로 인식됐다.


질펀한 청자색의 가을 하늘. 그 광활한 캔버스에 소녀는 황홀한 고독을 점묘하고 있었다.

by 칭기스킴 | 2008/10/02 13:38 | INSPIRATION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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